유교와 전통 저희 회사를 소개합니다.

      중국유교

      선진시대(先秦時代)

      선진시대는 진(秦) 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의 시대를 말하며, 명칭은 원시(原始)유학, 본원(本源)유학, 시원(始原)유학 등으로 다양하지만 모두 같은 의미이다. 이 시대는 중국철학의 기본 골격이 이루어지는 시기로 유학사적으로는 유가학파의 창시자인 공자를 필두로 하여 맹자(孟子)와 순자(荀子)를 중심으로 학술이 전개된 시기이다.

      공자께서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태어났으며, 맹자와 순자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태어났다. 춘추전국시대는 백가쟁명의 시기로 주나라 봉건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급격한 사회의 변화로 경제생활의 변동을 초래한 시대이다. 또한 농업혁명을 이루어낸 철기가 춘추시대 말기에 등장하여 전국시대에는 보편화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사회변화와 함께 사상적으로도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출현을 보게 된다.

      공자를 중심으로 한 유가학파는 도덕적 질서와 예법(禮法)의 질서로써 사회의 안정을 기하려 하였다. 그들은 부국강병만을 목표로 하였던 사회풍조에서 인도주의(人道主義)사상을 고취하여 인의(仁義)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 때의 철학은 인도(人道)를 보편적 원리로 제시하여 진리의 기준으로 삼았다. 인도(人道)는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천도(天道)라고 하여 공자는 항상 도(道)를 강조하였다. 제자백가들이 모두 도를 제시하지만 공자의 도는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아는 인도정신이 그 중심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원시유가의 철학적 문제는 인성(人性)이 주제였으며, 공자의 인간관을 위시하여 맹자와 순자에 있어서 인성의 선악문제가 그 논의의 초점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은 중국철학사상사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당시대(漢·唐時代)

      한·당시대의 유학은 한대로부터 위진남북조시대를 지나 수·당·오대에 이르기까지 약 천년동안의 시기로 중세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한대에는 경학(經學)과 황노술(黃老術),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노장의 현학(玄學), 그리고 수·당시대에는 불교가 융성하였다. 진나라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이후 한대 혜제 때에 이르러 협서율의 해제와 더불어 유학이 소생하게 되었으며 동중서의 건의로 정책상의 번영을 보았지만 유학사상의 입장에서는 침체기라고 할 수 있다.

      양한(兩漢) 4백년간의 통일기에는 제자백가와 같은 독창적인 사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사라진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었으며, 따라서 훈고학(訓詁學)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오랜 전쟁의 영향으로 정치적 속박을 싫어하여 노자의 무위자연사상이 환영을 받았다.

      무제(武帝) 때에는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어 유학을 장려하였고 동중서(董仲舒)는 현량대책(賢良對策) 등을 지어 유학사상을 가지고 정책을 제시하여 유학을 관학으로 확립하였다. 한대에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과 참위재이설(讖緯災異說)이 유행하였으며 천도(天道)와 인사(人事)가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특히 전한(前漢)의 동중서와 같은 금문경학자(今文經學者)는 자연주의와 신비주의사상으로 천인(天人)관계와 사회역사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왕망(王莽) 때의 유흠(劉歆)이 무제 만년(晩年)에 공벽(孔壁)에서 나왔다고 하는 고문경(古文經)을 가지고 진출함에 따라 금고문의 논쟁이 치열하였다. 금문가는 춘추공양학의 입장에서 공자를 소왕으로 높이고 고문경을 위서라하여 배척하였으며, 고문가는 공자를 '술이부작(述而不作)'한 지성선사(至聖先師)라 하고 고문경은 진화(秦火)의 잔여라 하여 소중히 여기며, 금문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후한말 정현(鄭玄)이 금고문의 학설을 두루 채용하여 경의(經義)를 통일함으로써 완화되었다.

      한대의 대표적 사상가로서는 노장의 청정무욕(淸淨無欲)을 말하는 회남자(淮南子), 금문학의 입장에서 천인관계와 음양설, 재이지변(災異之變)을 말하는 동중서, 유가와 도가의 학을 혼합하고 『태현(太玄)』과 『법언(法言)』을 지은 양웅(揚雄)을 들 수 있다. 신비사상으로 차있던 한대에 『논형(論衡)』을 지어서 시속(時俗)을 바르게 하고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학설을 세운 왕충(王充)은 특이한 존재라 할 것이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노장의 현학이 풍미하였다. 현학에서 삼현(三玄)이라 함은 주역(周易), 노자(老子), 장자(莊子)를 지칭한다. 이 시대에는 순수한 유학적 관점에서 일관된 학설을 전개한 학자가 드물었다. 그러므로 기존의 유가 경전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노장의 입장에서 접근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서 하안(何晏)의 『논어』 주석과 왕필(王弼)의 『주역』 주석은 모두 자연주의 입장에서 한유(漢儒)의 설을 교정한 것이었다. 그밖에 죽림칠현(竹林七賢)이 나타나서 현언(玄言)을 숭상하고 예법(禮法)의 구애를 받지 않으며 세속을 떠나 자유롭게 처신하고자 하는 청담(淸談)이 성행하였다.

      유학방면은 당초(唐初)에 국자학(國子學), 태학(太學), 사문학(四門學) 등 학교를 설치하여 학생을 양성하였으며 공영달(孔潁達)에게 명하여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게 함으로써 경서의 해석을 통일케 하였다. 그러나, 당은 육조(六朝)의 천박하고 겉만 화려한 기풍을 이어받아 경서로써 인재를 선발하였지만 사실은 시(詩)와 문(文)으로 등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학자들이 시문에 열중하였으나 유학에는 소홀하여 사상적인 깊이는 볼만한 것이 없었다. 후기에 이르러 한유(韓愈)의 배불론(排佛論)은 중국 고유사상의 전통으로서 유교원리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은 송대 성리학으로의 전환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고(李翺의 『복성서(復性書)』는 불교정신으로써 유교경전 특히 『중용』과 『주역』을 해석하여 송대 이학(理學) 형성의 단서를 제공하였다. 한유와 이고는 모두 불교 성행시대에 있어서 유교사상을 계승하여 송대로 연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것이다.

      송명시대(宋明時代)

      송명대는 유학을 부흥하는 획기적인 시대로 주자학(朱子學)과 양명학(陽明學)이 흥성하여 유학의 발전을 이루었다. 육조 이래로 노·불이 성행하여 침체되었던 유학은 송 태종의 성학(聖學) 권장으로부터 발흥하기 시작하여 한·당풍을 일신(日新)하고 도학(道學)을 높이 외치게 되었다. 주자학에 대해서는 신유학(新儒學), 성리학(性理學), 송학(宋學) 또는 정주학(程朱學) 등 여러 가지 명칭이 있으나 그 내용은 모두 같은 것이다. 즉, 송대에 비로소 이루어진 학문이라 하여 그 연대를 가지고 말하면 송학이라 하고, 정자가 고취한 학문을 주자가 계승해서 완성했기 때문에 정씨와 주씨의 이름을 따서 정주학이라 한다.

      또 한당시대에는 유학이 정치적, 문화적 방면으로 발달했으나 성리학은 불교의 전래와 노장사상의 영향으로 유학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을 말한다. 이 때의 '성(性)'은 불교의 불성이나 노장의 자연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인간의 본성은 하늘의 명이 인간성에 내재해 있다고 하는 중용사상의 천성(天性)을 말하는 것으로 이 인간 본성에 관한 이치를 '성리(性理)'라 하며, 이 성리를 연구하는 학문을 성리학이라 부르는 것이다.

      또 신 유학이라고 하는 것은 유교의 경전을 훈고 주석하던 한나라 때의 구주석(舊註釋)에 대하여 송나라 때에 성리학이 새로 일어났다고 해서 신 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명칭을 사용하지만 대체로 넓은 의미로는 정주학 또는 성리학이라 부른다. 주자학은 주렴계(周濂溪)로부터 소강절(邵康節),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장횡거(張橫渠) 등 모든 송대의 선현들의 사상을 종합 정리한 것이 주자학이기 때문에 개인보다는 송대의 학문 전체를 일컫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송학은 그 체계가 방대하고 넓은 것으로서 노장이나 불교의 초세간적인 혹은 관념적인 것만이 아니라, 철학적 이론과 보다 더 구체적 측면에서 문제를 책임있게 전개한 동시에 사회적으로 볼 때에는 더 민족적이고 정치적 측면에서 강력한 이론을 제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송대는 당시 주변의 이민족인 요, 금에 의해서 침략을 당하던 때였으므로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상당히 자주적인 독립정신이 요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자주정신을 강조하는 동시에 중화주의(中華主義)를 강조하고, 이른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민족주의적 대의명분론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송학은 당시에 있어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기능적 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성리학이 다방면의 요소를 머금고 있는 것이지만 철학적인 근본문제를 말하면 천리(天理)와 인성(人性)이 그 중요한 연구과제이며, 어떻게 천인(天人)이 합일(合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성리학의 골자이다. 선진시대에 있어서는 인간이 문제였으며 인도(人道)로서 인(仁)이 그 중심과제였다. 그러나 한·당 이래로 중세에 있어서는 인간문제보다도 우주와 자연의 도를 문제삼았으며, 인간 이상(以上)의 보편적 법칙을 탐구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면, 송대에 있어서는 천도와 인간이 그 본질에 있어서 어떻게 합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였다고 할 것이다.

      태극에 관한 문제는 성리(性理)를 논하는 사람이 이해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다. 그리하여 이 태극을 자세히 논구(論究)하고자 할 때에 문제를 바꾸어 이기설(理氣說)이 되는 것이다. 태극과 이기문제는 천도에 관한 것 즉 우주 자연의 근본문제를 총섭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요, 인간에 있어서 태극 이기를 말한다면 심성론이 되는 것이다. 심성론은 다시 성정(性情)문제로, 성정문제는 선악(善惡)문제로 되며,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 윤리적인 과제가 일어나는 동시에 이것의 실천방법을 말하면 수양론으로서 성(誠) 경(敬) 정(靜) 등이 구체적인 현실적인 문제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도와 인사에 관한 문제전반에 대하여 제일먼저 문제를 일으킨 것이 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이다.

      송대 성리학 이후 명대에 일어나는 양명학은 중국철학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제기하였다. 왕학(王學)의 요지를 들어 말하면 첫째 심즉리(心卽理), 둘째 치양지설(致良知說), 셋째 신민론(新民論), 넷째 지행합일(知行合一)로 대별할 수 있다. 심즉리는 육상산(陸象山)도 이미 주창한 것이지만 나머지는 왕양명(王陽明) 학설의 특징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치양지설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치양지(致良知)의 문제에 있어서 만일 치지(致知)의 '지(知)'를 선천적 지혜로 이해한다면 구태여 '양(良)'자를 더 할 필요가 없다. 이 '양'자는 좋다는 뜻이 아니라 천연(天然)이라는 뜻으로 우리가 경험하기 이전에 생래적(生來的)으로 얻은 총명한 선천적 지성(知性)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경험이 가능하고 지식을 수입하여 나의 것으로 축적할 수 있는 것은 그 근본 바탕에 양지(良知)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양지가 없다면 경험도 불가능하고, 사물의 인식도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행합일에 있어서 주자학파는 지행합일이 아니라 지행호진(知行互進)을 주장한다. 그러나 양명학에서는 지행이 합일한다는 것이다. 즉 분명히 아는 것은 행동에 옮길 수 있고, 행동에 옮길 수 없는 지는 아직 미숙한 지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가 행동하는 내용이 그의 지의 수준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는 행동의 시작이요, 행동은 지의 결과로서 지행이 언제나 합일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언행일치(言行一致)와 같이 생각해서는 옳지 않다. 언행은 일치하기 어렵지만 사람은 아는 바 그 지혜를 가지고 행동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노력하고 공부하지 않고서 우리의 지가 밝아지고 행동이 예법에 맞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치양지를 완성한 사람은 행동이 따라서 수반되며 그 지행은 다름 아닌 성자(聖者)가 가지는 바 지행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다만 양지를 이루되 완전무결하게 그 정도가 극치에까지 도달하였는가가 문제요, 능히 남김없이 양지를 이루었다고 하면 이것은 범인(凡人)과 성인이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 있어서 치양지설은 양명사상의 핵심이론인 것이다. 마음이 곧 이치요, 마음 밖에 사물이 따로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주학에 있어서는 『대학』의 삼강령 즉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에 있어서 원본 친민(親民)을 신민(新民)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양명은 고본대로 친민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간단한 듯 하면서도 그 학문적 세계와 차원이 달라진다. 신민이라 해석하는 것은 백성을 새롭게 한다, 밝게 한다는 뜻으로 무지(無知)에서 혜명(慧明)으로 가는 지적인 면에서의 해석이다. 이 지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성리학의 근본사상이 이(理)자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지적이요, 논리적인데 그 특징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지적이라고 하는 것은 감성과 의지를 배제하는 동시에 생명이 있는 인간과 사회의 구체적 현실을 그대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추상화하여서 관념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지나치면 현실과 유리된 공허한 학문이 될 경향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성리학은 후기에 이르러 관념화되는 폐단이 일어나게 되었다. 무극태극(無極太極), 이기설, 사단칠정(四端七情), 인심도심 등의 문제를 갑론을박(甲論乙駁)하여, 결론없는 관념의 논쟁이 되었다. 여기에 양명의 신민 해석은 친애, 친절 즉 정적인 요소와 의지적인 요소를 동시에 수반한다.

      유학의 종지가 효제자(孝悌慈)이니, 위로 효성을 바치고 옆으로 형제간에 우애하고 온 천하백성을 자애의 세계로 순화시켜 평화로운 개인과 사회가 되자는 데 요지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사변적인 체계철학으로부터 벗어나 사랑과 고통을 가진 인간의 생명을 문제삼는 실제적인 방향으로 전향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메마른 언어와 문자로서 논리의 모순성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고난을 당하며 애쓰는 인도주의적 사상이 깃들게 된다. 따라서 지행이 합일하는 방향으로 문제삼는 것이 양명철학의 특징이다. 이것이 관념인 듯 하면서 관념 아닌 행실의 학이라고 양명이 주장하는 까닭이다.

      청대(淸代)

      유학사의 마지막 단계는 실학을 특징으로 하는 청대이다. 양명학이 명말에 이르러 성행하였으나 공담의 폐단이 드러나 청초의 여러 학자들은 이 폐단을 교정하는데 노력하였다. 청대의 학문은 명대의 손기봉(孫奇逢),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왕부지(王夫之) 등에 의하여 단서를 열었다.

      손기봉, 황종희는 양명학을 주로 하였으며, 고염무, 왕부지는 송학을 주로 하였으나 모두 한당의 훈고학을 겸하였다. 대진(戴震))은 한학(漢學)의 입장에서 송학을 공박하였으며, 방동수(方東樹)는 송학의 입장에서 한학을 공박하였다.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같이 청말의 학자는 한대의 고증학과 송대의 의리학(義理學)을 절충한 학파라 하겠다. 고증학파에는 염약거(閻若璩)와 모기령(毛奇齡) 같은 대가들이 있다.

      이와 같이 청대는 고증학(考證學)이 발달하고 실증주의적(實證主義的)인 실학사상이 지배하게 된다. 그리하여 금문학의 발달, 문자학, 문헌학 내지 고서의 편찬으로 사고전서(四庫全書) 등 모든 학문이 전문화하였다. 그러나 전기(前期) 이후로 사상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당시의 청조는 중화민족이 아니고 만주족이었다. 그리하여 명말청초로부터 의리학파들은 이미 배청의식(排淸意識)이 강하였다. 중기 이후로는 민족감정, 민족의식이 고취되어 청조에 대해 반발이 일어났으며 청대의 공양학파(公羊學派)가 발생하게 된다. 공양학은 공자의 춘추학의 한 학파이다. 좌씨전(左氏傳), 곡량전(穀梁傳), 공양전(公羊傳)을 춘추삼전이라 하는데, 공양학파는 복수주의(復讐主義) 사상이 강하였다. 역사발전은 난세(亂世)에서 승평소강(昇平小康)으로, 승평소강으로부터 태평대동세계로 진전하는 삼단계 진화법인 삼세설(三世說)을 공양학파들은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주체를 강조하는 복수사상이 한민족의 만주족에 대한 배척의식으로 연결되었다. 청대 공양학파로서는 장존여(張存與)를 비롯하여 청말에 발전되어 강유위(康有爲)에 의하여 서양민주주의사상을 수용하려 하였고 공화혁명정신을 고취하여 마침내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