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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문십철

      비공민손(費公閔損)

      동배향(東配享) 제1위(第一位)

      춘추 말엽의 노나라 사람인 민손은 자가 자건(子騫)으로 공자보다 15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출신이 빈한하였으며 생모가 일찍 죽고 아버지가 재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계모는 민손을 심하게 학대하였다. 집안 사정이 매우 어려웠던 관계로 민손은 어리지만 직접 수레나 마차를 끌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중년에 아버지가 죽어 삼년상을 치르는 중에 노국에 전란이 일어나자 그는 상복 대신 군복을 입고 복역했으며, 그 일이 끝나자 다시 돌아와 삼년상을 마쳤다. 계씨(季氏)가 그를 비읍(費邑)의 재상으로 삼았으나 사양하고 평생 벼슬하지 않다가 나이 50세가 되어 죽었다.

      민손의 사람됨은 공근단정(恭謹端整)하였으며 침정(沈靜)하여 말이 없었다. 공자는 민손의 모습을 "온화하도다(誾誾如也)" 라고 하였다. 또 노나라 사람이 장부라는 창고를 개수하자 민자건이 "옛 것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필이면 반드시 고쳐 지어야만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을 공자가 듣고 "저 사람이 말을 하지 않을지언정 말을 하면 반드시 도리에 맞음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민손이 평소에 말은 매우 적게 하지만 일단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 반드시 사리에 맞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공자가 만년에 제자에 대한 평가에서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라 하였듯이 최고의 제자인 안연과 같은 반열에 둔 것을 볼 때 그의 덕행을 짐작할 수 있다. 민자건은 덕행뿐만 아니라 효로서도 뛰어나다. 『초학기(初學記)』 권 17에는 "민손과 증삼은 문도 중에서 효로 일컬어짐이 많아서 효를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증삼과 민손을 들지 않음이 없다"라고 되어있다.

      당나라 현종 개원8년(720)에 공문십철(孔門十哲)로 열입(列入)되었고 동왕 27년(739)에는 비후(費侯)로 추증되었으며 송나라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 낭야공으로 추봉(追封)되었다. 도종 함순 3년(1267)에 비공으로 개봉(改封)되었는데 명 세종 가정9년(1530)에 선현민자(先賢閔子)로 개칭되었다.

      운공 염 경(鄆公 冉 耕)

      서배향(西配享) 제1위(第一位)

      공자의 제자로 성은 염씨이고 이름은 경이며 자는 백우(伯牛)이다. 춘추 말엽 노나라 사람으로 노나라 양공 29년에 태어났으나 졸년은 자세하지 않으며, 공자보다 7세가 적다.

      출신이 빈한하였고 염옹(冉雍)과는 동종(同宗)이다. 공자가 노나라의 사구(司寇)가 되어 정승의 일을 섭행할 때, 염경을 중도의 재상으로 삼았다. 공자가 열국을 주유할 때에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행하였는데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온 뒤 얼마 되지 않아 악질(惡疾)에 걸려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염경은 공자의 제자 가운데 덕행으로 뛰어난 사람이다. 즉 공자는 제자들의 특장을 말하면서 덕행으로 안연 , 민자건, 염백우, 중궁을 들었고, 맹자도 "염우, 안회, 민자건은 덕행을 잘 말하였다"(『맹자』 [공손추상])고 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그는 일을 신중히 처리하였는데 일상생활의 잡다한 일을 잘 처리하는 독특한 재간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염경은 공자의 마음에 든 제자 중 한 사람으로 공자와의 관계가 아주 밀접했다. 즉 염경이 악질에 걸려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 했는데 공자는 먼저 그를 찾아가 창문 너머로 그의 손을 잡고 "이런 병에 걸리다니!"『논어』 [옹야])라고 탄식하였다. 염경의 덕행 수양은 비록 안연과 같다고 할 수 없지만 후대에 끼친 영향은 컸다. 즉 맹자가 그에 대해 "성인의 전체를 갖추고있다"(『맹자』 [공손추상])고 높이 평가한 것이 그것이다.

      당 현종 개원 8년(720)에 공문십철에 열입 되었고 개원 27년(739)에 운후(鄆侯)로 추증되었으며, 송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는 동평공(東平公)으로 추봉되었고 도종 함순 3년(1267)에 다시 운공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설공 염옹(薛公 冉雍)

      동배향(東配享) 제2위(第二位)

      춘추 말엽의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중궁이며 공자보다 29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출신이 매우 한미(寒微)하였으며 염백우(伯牛) 동종(同宗)이다. 일찍이 공자를 스승으로 따르면서 열국을 주유하였으나 사적이 분명하지 않다.

      『논어』에 의하면 염옹의 사람됨은 인독돈후(仁篤敦厚) 침정과언(沈靜寡言)하였으며, 국량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논어』 [옹야]에서 공자가 "중궁은 군왕의 자리에 앉을 만하다(雍也可使南面)" 고 한 것은 중궁의 마음이 넓고 크며 간략하고 중후하여 인군(人君)의 도량이 있음을 찬상(讚賞)한 것이다. 또 『논어』 [공야장]에는 어떤 사람이 염옹에 대해서 "인(仁)하나 말재주가 없습니다.<仁而不여>"라고하자 공자는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으나 말재주를 어디다 쓰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이는 공자가 말 잘하는 사람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가진 것을 감안할 때 크게 칭찬한 것이다.

      『논어』 [안연]에서 중궁(仲弓)이 인을 물으니 공자는 "문을 나갔을 때는 큰 손님을 뵌 듯 하고 백성에게 일을 시킬 때에는 큰 제사를 받드는 듯이 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하니, 이렇게 하면 나라에도 원망함이 없으며 집안에도 원망함이 없을 것이다."라고하자 염옹은 "제가 비록 불민(不敏)하오나 이 말씀에 종사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과 함께 공자가 제자들을 평하면서 안연(顔淵). 민자건(閔子騫), 염백우(伯牛)에 이어 중궁을 언급하여 그가 덕행으로 뛰어난 제자임을 밝혔다.

      그는 또 정치적 문제에 탁월한 견해를 가졌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논어』 [옹야]에서 염옹은 "자신이 경에 처하면서 간략함을 행한다<居敬而行簡>"라는 말을 하자 공자는 "옹(雍)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이는 벼슬을 하는 자는 정책을 연구함에는 아주 신중히 그리고 진실하게 하여야 하지만 그것을 실행할 때는 간단한 형식으로 실행해야 한다는 염옹의 정치적 소신을 말해 주는 것이다.

      중국 역대조정에서는 염옹을 매우 중시하였는데 동한(東漢) 명제 영평 15년(72)에는 '공문십철'에 열입시켰다. 27년(739)에는 설후(薛侯)로 추증되었으며, 도종 함순 3년(1267)에 설공(薛公)으로 개봉되었다.

      제공 재여(齊公 宰予)

      서배향(西配享) 제2위(第二位)

      공자의 제자로 춘추 말엽 노나라 사람이다. 재(宰)씨이고 이름은 여(予)이며 자는 자아(子我)인데, 재아(宰我)로 칭하기도 한다. 노나라 소공 20년에 출생하여 주(周) 정왕(定王) 11년에 졸(卒)하였으며, 공자보다 29세가 적다. 가계와 평생의 사적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사기』에 의하면 그는 공자가 열국을 주유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하였는데 공자는 여러 번 그를 외교 사절로 제나라와 초나라에 파견했다고 한다.

      재여는 지혜가 뛰어났고 언변에도 능한 사람이었다. 공자가 그를 언어에 뛰어난 자로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맹자와 사마천도 그가 언변에 재능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맹자는 또한 "재아, 자공, 유약은 지혜가 족히 성인을 알만하다"(『맹자』 [공손추상])고 하여 재여의 지혜가 뛰어났음을 말하였다.

      재여는 벼슬에 재능이 있는 자로 이름났고 이에 대해 공자로부터 인정도 받았다. 이는 공자가 여러 번 그를 제, 초등의 나라에 외교 사절로 보냈던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인격수양과 학업에는 비교적 나태했기 때문에 공자로부터 여러 번 질책을 받기도 하였다. 즉 재여는 '오제(五帝)의 덕(德)'에 대해 공자에게 질문했다가, 또 낮잠을 자다가 공자한테 질책을 당했으며, 애공의 사(社)에 대한 질문에 답변해 준 것에 대해서도 공자로부터 비평을 받았다. 공자가 비록 여러 차례 재여를 비평하였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공자는 재여를 '언어'에 뛰어난 자로 인정했다. 맹자가 "내(재여)가 부자(夫子)를 관찰하건대 요순(堯舜)보다 훨씬 나으시다"(『맹자』 [공손추상])라고 하였듯이 재여도 공자를 매우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여는 당 현종 개원 8년(720)에 공문십철에 열입되었으며, 동왕 27년에 제후(齊侯)로 추봉되었고, 송 진종 대중상부 2년에 임치공(臨淄公)으로 봉해졌으며, 도종 함순 3년(1267)에 다시 제공으로 개봉되었다.

      여공 단목사(黎公 端木賜)

      동배향(東配享) 제3위(第三位)

      춘추 말엽의 위국인(衛國人)으로 성은 단목(端木)이며, 이름은 사(賜)이고, 자는 자공(子貢)이며, 공자보다 31세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출신이 한미(寒微)하여 청년시기에 곧 상업 활동을 하였다. 공자가 열국을 주유(周遊)하면서 위(衛)나라에 이르렀을 때 자공이 배알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후에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면서 상업을 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공자의 서세(逝世)에는 모든 제자가 삼년상을 입었으나 유독 자공만은 무덤가에 묘막(墓幕)을 짓고 육년이 지난 후에 돌아갔다.

      자공은 천성이 영오(穎悟)하고 낙관적이며 활발하였고 정리(情理)에 통달하였지만 다른 사람의 시비(是非)에 대하여 평론하기를 좋아하는 흠이 있었다. 이는 그의 마음이 곧고 말하는 것이 솔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언변이 매우 좋은 것과도 연관이 있다. 그는 언변에 매우 능하여 외교적인 면에서 비범한 재능이 있었다. 공자가 제자들을 평하면서 "언어에는 재아와 자공"이라 한 것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자공의 가장 두드러진 요소라면 역시 화식(貨殖)에 뛰어나다는 점이다. 그는 젊어서부터 상업활동에 종사하였는데 공자를 종사한 뒤에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자공은 많은 재산을 모았으나 이러한 일로 인하여 때로는 학업을 게을리 하고 예를 소홀히 하였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공은 공자의 각별한 총애를 받은 제자였다. 이는 자공이 공자에게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물었을 때 "호련(瑚璉)"이라 대답한 것이나 "지나간 것을 알려주면 앞에 올 것을 안다"고 한 점 등을 살펴보면 충분히 짐작된다. 만년에는 공자의 학설을 전파하는 공로를 세웠다.

      당 현종 개원 8년(720)에 공문십철의 지위에 열입되었으며, 동왕 27년(739)에 여후(黎侯)로 봉해졌고, 송나라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 여양공(黎陽公)으로 추봉하였는데, 도종 함순 3년(1267)에 여공(黎公)으로 개봉하였다.

      서공 염구(徐公 冉求)

      서배향(西配享) 제3위(第三位)

      공자의 제자로 춘추시대 말엽 노나라 사람이다. 염씨이며 이름은 구(求)이고 자는 자유(子有)인데, 염유(冉有)로 일컫기도 한다. 노 소공 12년에 출생하였으나 졸년은 자세하지 않으며 공자보다 29세가 적다.

      출신은 한미 했으며 중궁, 염우와는 동족이다. 청년시절에 그는 계씨(季氏)의 가신으로 있으면서 공자를 스승으로 받들다가 나중에는 공자를 따라 열국을 주유하였는데, 노 애공(哀公) 5년 가을에 노나라의 집정자였던 계환자(季桓子)가 죽고 계강자(季康子)가 집정하자 공지어(公之魚)의 추천으로 진(陳)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돌아와 계씨 가족의 총리를 맡았다. 애공 11년에 제나라와 노나라가 교전했는데 이때 염구가 계씨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의 진영에 돌입하여 제군을 대파했다. 그 후 염구는 곧바로 계씨 가족의 직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염구는 천성이 활발하고 낙관적이며 솔직하고 숨김이 없었다. 즉 그가 공자를 시종할 때는 화락하고 온아한 얼굴을 하였다. 그리고 학업을 게을리 하여 공자에게 꾸지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역부족(力不足)을 말하여 솔직하고 숨김없는 천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다재다예(多才多藝)한 사람으로 경제관리에 대한 재능과 군사재간(軍事才幹)이 출중하였다. 계강자가 실시하는 전작제도(田作制度)를 지지하여 세 수입을 증대시키고 계씨를 갑부로 만들기도 하였으며, 계씨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의 군사를 대파하기도 하였다.

      염구는 정사분야에서 가장 저명한 자였다. 공자는 염구를 정사분야의 제일로 지목했으며, 또 노나라 대부인 맹무백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염구의 정치 재간을 칭찬했다. 그러나 그는 인격 수양 면에서 노력한 흔적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공자에게 학업을 비교적 게을리 하면서 역부족을 느낀다고 하였고, 공자도 그의 인덕 수양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 현종 개원 8년(720)에 공문십철에 열입되었고, 개원 27년(739)에는 서후(徐侯)로 추봉되었으며, 송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 다시 팽성공(彭城公)으로 봉해졌는데 도종 함순 3년(1267)에 다시 서공으로 개봉되었다.

      위공 중유( 衛公 仲由, BC 542 - BC 480)

      동배향(東配享) 제4위(第四位)

      춘추 말엽의 노국인(魯國人)으로 성은 중(仲) 이름이 유(由)이며 자는 자로(子路)이나 계로(季路)로 쓰기도 한다. 출신이 한미 하였으며, 공자보다 9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자로는 젊었을 때 웅계(雄鷄: 용병을 상징하는 수탉 깃으로 장식한 관)를 쓰고 가돈(용맹을 상징하는 수퇘지 가죽으로된 띠)을 차며 공자를 능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공자가 예를 차려 가르치자 마침내 유자(儒者)로서 자신을 맡겨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공자를 따라 노나라에 있으면서 벼슬을 할 때 계씨의 비읍(費邑)의 재상이 되었으며 뒤에 노나라를 떠나 위(衛)나라에 이르러서는 위국 대부의 포읍령(蒲邑令)이 되었다. 공자가 14년간의 주유를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올 때에 자로도 함께 돌아왔으나 위국 포읍령의 직책은 버리지 않았다. 노 애공 15년에 위국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몸소 그 난리에 뛰어들어 죽었으니 나이 63세였다. 자로는 위인이 용맹하였으면 의(義)를 숭상하였다. 이는 위나라에 내란이 일어났을 때 직접 말을 몰아가서 싸우다 죽은 일에서도 알 수 있다.

      자로는 공자의 가장 가까운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공자의 평에 의하면 정사와 효도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에 집이 가난하여 자신은 채소를 먹고 물을 마시면서도 부모를 위하여 백 리 밖에서 쌀을 지고와서 봉양하였다. 장성하여 차츰 귀한 지위에 오르게 되자 깊이 탄식하면서 "슬프도다 가난이여! 살아 계실 적에는 봉양할 길이 없었고 죽어서는 예를 차릴 길이 없구나!" 라고 하였다. 한편 공자가 자로를 "승당(升堂)은 하였으나 입실은 하지 못했다"고 평한 것에서는 자로의 인덕(仁德)수양이나 학문은 안연등의 여타 제자들에 미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로는 살신성인하는 의(義)와 용(勇)이 있었으며 말을 하면 반드시 지키는 신의가 있었으며 자신의 잘못을 지적 받으면 기뻐하는 미덕 등을 지녀 후대 사람의 칭송하는 바가 되었다.

      당 현종 개원 8년(720)에 공문십철에 열입 시켰고 동왕 27년(739)에는 위후(衛侯)로 증직되었고 송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 하내공(河內公)으로 가봉되었는데 도종 함순 3년(1267)에 위공으로 개봉되었다.

      오공 언언(吳公 言偃)

      서배향(西配享) 제4위(第四位)

      언언(言偃)은 성이 언(言), 이름이 언(偃)이며 자는 자유(子游)이다. 오(吳)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45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공자가어』에는 노인(魯人)으로 공자보다 35세 적다고 되어있다.

      자유는 공자가 열국을 주유한 후에 제자가 되어 비교적 종사한 것이 늦기는 하였으나 배움에 능하여 이룸이 있었다. 특히 자유는 유가에서 주장하는 예악정치(禮樂政治)를 몸소 실천한 사람이다. 자유가 무성재(武城宰)가 되어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공자가 무성에 갔을 때 현가(絃歌)의 소리를 듣고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닭 잡는데 어찌 소잡는 칼을 쓰겠느냐?"하고 하자 자유는 "예전에 선생님께 듣기로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하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공자는 "자유의 말이 옳다. 지금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다"라고 하였다.

      맹자도 "자하, 자유, 자장은 모두 성인의 일부분이 있다."라고 하였다. 자유는 사람됨이 자잘한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여 대화나 일의 처리에서 소홀함이 있었다. 이는 자하와의 논쟁에서도 알 수 있다. 자하가 "큰 덕이 한계를 넘지 않으면 작은 덕은 출입하여도 괜찮다"고 하자 자유는 "자하의 제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며 응대하고 진퇴하는 예절을 당해서는 괜찮으나, 이는 지엽적인 일이요 근본적인 것은 없으니 어찌하겠는가?"라고 했다. 그러자 자하가 듣고 "언유의 말이 지나치다. 군자의 도에 어느 것을 먼저라 하여 전수하며, 어느 것을 뒤라고 하여 게을리 하겠는가? 초목에 비유하면 구역으로 구별되는 것과 같으니. 군자의 도가 어찌 이처럼 속이겠는가? 처음과 끝을 구비한 것은 오직 성인이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자하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나누어서 논할 수 없음을 주장한 반면, 자유는 그것을 분명히 구분하여 큰일에는 그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작은 일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문십철에 열입 되었으며, 당 현종 개원 27년(739)에 오후(吳侯)로 봉해졌고, 송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 단양공(丹陽公)으로 가봉되었다. 그후 남송 도종 함순 3년(1267)에 오공으로 개봉되었다.

      위공 복상(魏公 卜商)

      동배향(東配享) 제5위(第五位)

      복상(卜商)은 성이 복(卜), 이름이 상(商)이며, 자는 자하(子夏)이다. 위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44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자하는 출신이 빈한하였으나 재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로 인해 만년에 강학을 열어 배우는 사람들이 삼백여 인에 이르렀으나 매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학문을 매우 좋아하여서 위문후(魏文侯)가 스승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생 동안 곤궁하게 살았으며 만년에 자식까지 잃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공자가 제자들을 평할 때 문학에는 자유(子游)와 자하(子夏)라 하였는데 이때의 문학이란 바로 『시경』, 『서경』, 『역경』등 유가 경전을 말하는 것으로 자하는 이들을 전승하는데 지대한 공이 있었다. 한 번은 자하가 " '어여쁘게 웃는 얼굴 보조개 귀여우며, 아름다운 눈 초롱초롱 반짝거리네. 흰 바탕에 채색 베푼 것이로다.'라고 함은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라고 질문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뒤에 하는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자하가 "예는 뒤에 하는 것이로군요?"라고 말하자, 공자가 "나를 일깨워주는 사람은 상이로구나! 비로소 함께 시를 말할 만하다."(『논어』 [팔일]) 라고 하였다. 이는 공자가 자하의 시에 대한 견해를 극찬한 경우로서 문학에는 자하라고 한 공자의 말과 맥을 같이하는 대화이다.

      당 태종 정관 21년(647)에 종사되었고 개원 8년(720)에 공문십철에 열입 되었으며 다시 동왕 27년에 위후(魏侯)로 봉해졌다. 송 진동 대중상부 2년(1009)에는 동아공(東阿公)으로 가봉되었는데, 도종 함순 3년(1267)에 다시 위공(魏公)으로 개봉되었다.

      영천후 전손사(潁川侯 颛孫師)

      서배향(西配享) 제5위(第五位)

      전손사는 성이 전손이고 이름이 사이며 자는 자장이다. 진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48세가 적은 공자의 제자이다. 『여씨춘추』에는 "노지비가(魯之鄙家)"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출신이 매우 천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공자는 자장을 평하여 '벽'이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주자는 '용모에만 익숙하고 성실성이 부족함'이라고 풀이하였다. 또 자장이 성인의 도를 묻자 공자는 "성인의 자취를 밟지 않으면 방에 들어갈 수 없다" 라고 하여 자장의 학문 태도가 형식상의 모방에 다소 치우침이 있어서 승당입실(升堂入室)하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일찍이 자장의 부족함에 대하여 반복해서 충과 신에 대한 교육을 하였다. 자장이 정치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는 "마음에 두기를 게으름이 없이 하고 행하기를 충성으로써 한다" 라고 하여 충(忠)과 무권(無倦: 게으름이 없을 것)을 강조하였다. 또 자장이 덕을 높이며 의혹을 분별함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는 "충신(忠信)을 주장하며 의에 옮김이 덕을 높이는 것이다"라고 하여 충과 신을 강조하였다. 또 행(行)에 대하여 물었을 때는 말은 충신(忠信)하고 행실은 독경(篤敬)할 것을 강조하였다. 자장은 공자의 가르침을 항상 공경히 듣고는 꼭 띠에 써서 그렇게 행하도록 노력하여 게을리 하지 않아 마침내는 공자의 우수한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당 현종 개원27년(739)에 진백(陳伯)으로 봉해졌고, 송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 완구후(宛丘侯)로 가봉되었으며, 정화(正和) 원년(1111)에 영천후(潁川侯)로 봉해졌다. 남송 도종 함순 3년(1267)에 진국공(陳國公)으로 가봉되었고 공문십철로 올려서 성묘(聖廟)에 종향(從享)되었다.